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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1. 18. 12:09
박종인의 땅의 歷史] 파락호 핏줄 속에는 선비의 기개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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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파락호 핏줄 속에는 선비의 기개가 흘렀다

입력 : 2017.01.18 03:04 | 수정 : 2017.01.18 11:26

[66] 파락호 김용환과학봉 김성일 종택이 있는 안동

퇴계 이황 도산서원… 서애 류성룡 병산서원… 학봉 김성일의 학봉 종택…
서애와 학봉 서열 문제로 400년 가까이 첨예한 분쟁도
김성일 종손 김용환, 천하의 파락호로 전락해 노름판 전전
그가 죽고 나서야 파락호 불명예 감수하며 전 재산 털어 독립군 지원 밝혀져
안동에서 선비의 향기 그리우면 그 흔적을 남겨놓은 선비들의 삶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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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생전에 투전판 들락거리며 신줏단지를 세 번이나 팔아먹은 천하의 파락호(破落戶) 김용환이 죽었다. 그리고 49년 뒤, 파락호의 딸이라 멸시받던 고명딸 후웅이 이리 회상하였다. "자랑스런 우리 아배 학봉 종손 참봉 나으리, 높은 뜻 알고 나니 어느 누가 원망하랴, 에고 에고 우리 아배." '안동은 선비의 고장'이라는 말은 지극히 상투적이다. 그럼에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왜 그런가. 안동에서 한 난봉꾼의 삶을 본다.

조정의 호랑이 김성일

학봉 김성일의 15대손 김종길.
학봉 김성일의 15대손 김종길.

동인과 서인이 피비린내 나게 대립하던 1590년 3월 5일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은 조선통신사로 왜(倭)를 향해 떠났다. 근 1년 뒤 돌아온 황윤길은 "반드시 일본이 침략해온다"고 보고했고 김성일은 "그런 조짐을 전혀 보지 못하였다"고 보고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터졌다. 훗날 류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김성일이 민심 동요를 우려하여 그리 답하였다"고 변호했으나 학봉 김성일의 후손들은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속앓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김성일은 여러 차례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 선조 앞에서 "신하의 간청을 거부하는 폐단이 있으니 왕께서는 걸왕(桀王), 주왕(紂王) 같은 폭군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고(별명이 '조정의 호랑이'[전상호(殿上虎)]였다), 그때만 해도 금기(禁忌) 중의 금기였던 단종 임금 복위를 주장하는 앞뒤 가리지 않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게다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동인당은 박멸되고 400년 가까이 제대로 된 정권 교체 한 번 없이 서인과 노론이 집권하니 동인 김성일의 복권은 꿈꿀 수 없었다.

그럼에도 김성일은 임진왜란 발발 이틀 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돼 패전한 고을들을 되찾았고 이후 좌도관찰사로 임명돼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니, 이 전투가 진주대첩이다. 김성일은 그 진주에서 전염병이 옮아 죽었다.

그가 죽고 87년 뒤인 1679년 숙종 때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안동 유림과 문중에서는 그를 '자손이 끊길 때까지 사당에서 위패를 치우지 않는' 불천위(不遷位)로 제사를 지낸다. 종택은 안동 금계마을에 있다.

15대손 김종길(金鍾吉·77)이 말했다. "전쟁 때 호남 의병장 고경명이 '학봉 댁에 가면 거둬줄 것'이라며 자식 하나를 우리 집에 보냈다. 그리고 400년 뒤 내가 종손이 된 뒤 고경명 선생 13대손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덕분에 가문이 이어졌다고." 종택 정원에는 그 후손이 심은 나무가 서 있다.

병호시비(屛虎是非)

조선 중기 위대한 철학자 퇴계 이황은 숱한 제자를 길렀다. 그 가운데 돋보이는 인물이 류성룡과 김성일이다. 서로가 퇴계의 적통이라 주장한다. 그 주장이 400년 가까이 분쟁을 낳았다. 병호시비라 한다.

1573년 퇴계의 제자들이 안동에 호계서원을 짓고 이황 신위를 모셨다. 그리고 1625년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을 추가로 모시면서 서열에 다툼이 생겼다. 벼슬은 류성룡이, 나이는 김성일이 위다. 학봉 세력이 승리했다. 서애 측은 납득하지 않았다. 1805년 서울 성균관에 있는 문묘에 영남 선비를 추가로 모시자는 논의가 벌어졌다. 청원문을 쓰는데, "학봉과 서애를 추가해달라"와 "서애와 학봉을 추가해달라"라는 문구를 놓고 또 싸움이 벌어졌다. 석 달 싸움 끝에 정부는 아예 청원을 기각해버렸다. 그러자 서애 측은 호계서원에 모셔져 있던 류성룡의 위패를 병산서원으로 가져가 버렸다. 학봉 측도 위패를 임천서원으로 가져가 버렸다. 퇴계의 위패도 도산서원으로 가져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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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제자 류성룡과 김성일의 후배들은 두 사람의 서열을 놓고 400년 가까이 다툼을 벌였다. 그 결과 호계서원에 모셨던 스승과 두 제자 신위는 뿔뿔이 흩어지고, 서원은 폐허가 됐다. 그래도 안동 땅 선비들은 대부분 살신성인이라는 덕목을 실천한 삶을 살았다. /박종인 기자

훗날 영남 유림들 힘이 필요했던 흥선대원군이 두 문중을 타협시키려 했지만 무산됐다. 분기탱천한 대원군은 호계서원을 없애버렸다. 서애와 학봉 문중은 통혼도 하지 않는 서먹한 사이로 400년을 살았다. 일제 강점기 호계서원이 복원됐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2013년 경북도지사가 중재해 두 세력은 장장 2m짜리 합의문을 작성하고 호계서원 또한 새로 복원해 세 선비 위패를 함께 모시기로 결정했으니, 호계서원 설립 이후 388년 만이다. 여전히 두 문중은 서로가 적통이라 주장하고 있으니, 언제 또 시비가 재연될지 알 턱이 없다. 그 사이에 호계서원은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언덕 위로 이건됐다. 이건됐던 서원은 문 하나 남고 철거돼 다른 곳에 복설 중이다. 선비 정신이 자존심과 세력 싸움으로 엇나가 벌어진 참사다.

종손의 거칠고 명예로운 삶

김종길이 말했다. "학봉 할아버지가 단종 복위 상소를 올렸을 때 어떻게 무사했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 덕에 할아버지가 복위되고 시호까지 받았으니까."

2008년 삼보컴퓨터 사장을 끝으로 은퇴하고 15대 종손이 되었을 때,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대학도 문중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다녔고, 혼례도 문중에서 합의한 진성 이씨 퇴계 후손 이점숙과 이름도 모르고 치렀다. 종부의 길이 두렵던 손녀가 "죽어도 못 하겠다"고 버티자 "그럼 내가 죽지" 하며 사돈 할아버지가 사흘 단식으로 뜻을 관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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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류성룡 신위를 모신 병산서원 만대루. 북은 불량 선비를 혼내기 위해 학생들을 소집하던 도구다.

종손은, 종손의 삶은 그렇게 명예롭고, 거칠다. 김종길이 말했다. "경상감사 할래 학봉 종손 할래 하면 학봉 종손이 정답인 때가 있었다. 내가 그게 된 거다." 문중 사람들 자기네는 못 해도 종손은 해야 하고, 자기네는 막 해도 종손은 해서 아니 될 게 있다. 그런데 1887년 남부끄러워 낯 들고 안동 땅을 다닐 수 없는 천하의 패륜아요 파락호가 이 가문에 태어났으니 이름은 김용환(金龍煥)이다.

천하의 파락호 김용환

김용환은 하라는 입신양명은 팽개치고 밤이면 투전판을 들락이며 돈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몇 차례 독립운동을 하고서 구속된 적이 있기에 하다 말겠지 했지만, 장난이 아니었다. 그가 13대 종손이 된 그때 학봉 문중 땅은 13만 평이요 재산은 지금 시가로 230억원이었다. 이 문중 재산을 야금야금 노름판에 털어 넣고 그도 모자라 사당에 모셔뒀던 신줏단지까지 세 번이나 팔아치웠다.

판이 벌어지면 어김없이 마지막 판에는 김용환 패거리가 끼어들었다. 김용환이 "내가 이겼다"고 고함지르며 돈을 쓸어담으면 패거리가 몽둥이를 들고 판돈을 자루에 넣고 사라지곤 했다. 시집간 고명딸이 가져온 장롱 살 돈도 판돈으로 사라졌다. 남을 믿지 못하여 하인이 손님 밥상을 가져오면 대청마루로 직접 나와서 상을 받았고, 한여름에도 화롯불을 켜놓고 주판알을 튀기다가 정체불명의 문서를 태워 인멸하는 일을 일삼았다. 문중 그 누구도 감히 얼굴을 들고 안동 땅을 걷지 못하였다.

반신반의한 건국훈장

해방이 되고 이듬해 김용환이 죽었다. 평생 동지 하중환이 물었다. "다 털어놓으시게." 김용환이 말했다. "그러지 마소. 당연한 일이거늘, 누가 믿을까." 죽기 전 김용환은 자신에 관한 일체 기록을 소각해버렸다.

입을 다물겠다는 언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1948년 김용환의 탈상 때, 하중환이 약속을 어기고 상세한 이력을 쓴 제문(祭文)을 읽었다. 그제야 이 망나니의 정체가 밝혀지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노름판에서 사라진 돈, 신줏단지 팔아 그러모은 돈, 문중 전답 팔아서 해 처먹은 돈은 몽땅 만주 독립군 군자금으로 들어간 것이다. 요시찰인물로 낙인찍힌 문중 장손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파락호 시늉밖에 없었고, 김용환은 문중 재산을 팔아먹었다는 불명예를 죽을 때까지 감수한 것이다.

또 세월이 흘러 1995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이 파락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때 고명딸 김후웅이 조카인 15대손 김종길 형제에게 이리 읊었다.

"종길 형제 보아라. 철없는 외동딸 무식한 이 여식이, 누구 앞에서도 떳떳이 우리 아배 변명 한 번 할 수 없었던 것이, 한스럽고 후회스럽다.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농 사오라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삼천리 금수강산 내 나라를 찾았어도 우리 아배 지난 이력 자랑 한 번 아니하매, 영문을 알지 못해 팔십 평생 살다 보니 이런 영광 보는구나, 자랑스런 우리 아배 학봉 종손 참봉 나으리." 김종길이 말했다. "할아버지 행적의 만분의 일이라도 따라가야 될 텐데, 부담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현재 열심히, 착하게 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

왜 안동이 선비의 고장인가. 도산서원이, 병산서원이, 하회마을이 있고 학봉 종택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곳을 거쳐 간 선비들이 남긴 흔적에 선비 정신이 진하게 배어 있기에 그러한 것이다. 학봉 가문에 독립유공자가 17명이다.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을 비롯해 손자까지 독립유공자 9명이 고성 이씨 고택 임청각에서 나왔다. 향산 이만도를 비롯한 퇴계 이황 문중 하계파 후손도 25명이 독립지사였다. 14대 후손 이육사는 시인이기에 앞서 권총술과 수류탄 제조에 능한 독립투사였다. 무실마을 전주 류씨 가문도 16명이 나왔다. 이들이 바로 선비다. 보아라, 이들이 안동이다.

[안동 여행수첩]

안동 여행지도

1. 도산서원: www.dosanseowon.com, (054)840-6599
2. 병산서원: www.byeongsan.net, (054)858-5929
3. 학봉종택: www.hakbong.co.kr, (054)852-2087, 고택 체험 가능
4. 퇴계태실: www.nosongjung.co.kr, (054)856-1052, 퇴계 이황이 태어난 방 보존. 고택 체험 가능
5. 이육사문학관: www.264.or.kr, (054) 852-7337, 2월 1일 개관
6.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www.dosansunbi.kr, (054)851-2000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1/18/201701180022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