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8.16 07:39
1945~1949: 다시 찾은 우리말
광복(光復)의 의미는 단순한 해방이 아니다. 빼앗긴 주권을 다시 찾았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1945년의 베스트셀러가 외솔 최현배의 ‘우리말본’(정음사)’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의 복권. 잃어버린 우리말을 되찾은 민족의 기쁨을 한 권으로 보여준다. ‘우리말본’은 국어의 문법 체계를 집대성한 한국어 문법책. 1946년의 베스트셀러는 최남선의 ‘신판 조선역사’(삼중당)였고, 1947년의 베스트셀러는 김구의 ‘백범일지’였다. ‘백범일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임정(臨政)의 주석을 맡았으니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라 ‘인’ ‘신’ 두 아들에게 아비의 행적을 알리고자 기록하노라.”
1950~1960: 전쟁... 가난한 시대에 희망을 던지다
궁핍했다. 나라와 국민이 모두 폐허. 그래서 더 문학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모윤숙의 ‘렌의 애가’(청구문화사), 조지훈의 시집 ‘풀잎단장’(창조사), 정비석의 ‘자유부인’(정음사), 황순원의 ‘학’(중앙문화사), 노벨문학상을 받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여원사) 등이 이 시절의 베스트셀러였다. 지금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김형석 서울대 명예교수의 철학 에세이 ‘고독이라는 병’(삼중당)이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처음 얻은 것도 이 무렵이다. 1953년의 베스트셀러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수도문화사)라는 점은 상징적이다. 6·25 참화를 겪은 국민은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위로와 희망을 함께 얻었다.
1961~1970: 4·19와 5·16을 넘어
민심은 기대와 체념을 왕복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정향사)은 한 젊은 지식인이 광장과 밀실을 오가다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길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아마 4·19 직후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북한 체제에 대한 사실적 묘사와 분단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감한 접근은 이후 한국 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고, 다소 관념적이지만 사색적 묘사는 한국 문학을 한 단계 확장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지금도 여전히 읽히는 스테디셀러이기도 하다.
1960년대 국민은 김찬삼의 ‘세계일주 무전여행기’(어문각)를 읽으며 직접 가보지 못한 미지의 땅을 간접 체험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마음, 한반도 바깥으로 시야를 확장하게 해 준 것도 여행가이자 지리학자 김찬삼의 책들이었다.
이 시절 지친 남성들을 위로한 또 하나의 장르는 무협지. 소설가 김훈의 부친인 김광주의 ‘정협지’(신태양사)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권법 가문의 쌍둥이가 어려서 헤어졌다가 고수들의 결투장에서 서로 형제임을 확인한다는 뻔한 내용이었지만, 5·16직후 냉각된 사회에 장풍과 신출귀몰 검법을 앞세우며 독서계를 강타했다. 김은국의 ‘순교자’(삼중당), 박경리의 ‘시장과 전장’(현암사),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한국정경사),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문예출판사),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동민문화사), 카프카의 ‘성’(삼중당),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문예출판사)도 많이 읽혔다. 장식용 전집물과 문고본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1971~1980: 미국의 대중문화, 산업화의 빛과 그늘
새마을운동으로 요약되는 산업화의 시절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팝 문화가 본격적으로 쏟아져 들어온 시기이기도 하다.
에릭 시걸의 ‘러브스토리’(문예출판사)와 존 오스본의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일월서각)이 1970년대의 베스트셀러였다. 부유한 하버드대 남학생인 올리버 베럿과 가난한 여대생 제니퍼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는 스크린으로도 옮겨져 당대 청춘들의 손수건을 적셨다. 하버드 법대생의 도전과 성장 스토리 역시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모았다.
아널드 토인비의 ‘토인비와의 대화’(범우사)를 읽으며 교양을 쌓았고, 법정 스님의 ‘무소유’(범우사)를 통해 마음을 다스린 시기도 이때였다. 한수산의 ‘부초’(민음사)는 이 출판사가 제정한 ‘오늘의 작가상’ 첫 회 수상작으로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로 이어지며 화제의 문학상이 됐다. 난장이 가족이 강제 철거를 당하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문학과지성사)은 급격한 산업화의 이면을 보여주는 반성문이었다.
'난중일기'로 6·25전쟁 아픔 달래
'인간시장' 장총찬도 종횡무진...
IMF 등 압축성장 폐혜 90년대엔
'좀머씨 이야기' '가시고기' 인기
1981~1990: 민주화의 욕망과 소비 욕망의 분출
이 시기 베스트셀러는 이중적이다. ‘독재 타도’로 대표되는 민주화의 시대, 동시에 소비자본주의의 욕망이 대분출을 일으킨 시기였다. 저금리, 저유가, 저환율. 민주주의는 초라했지만, 경제는 호황이었다. 일반 대중은 선(仙)과 민족주의에 탐닉하기도 했다. 김정빈의 ‘단’(丹·정신세계사)이 대표적이다.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초인 수준으로까지 올릴 수 있다는 유혹은 고단한 현실을 잊고 싶었던 대중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마치 람보처럼 죽지도 않고 악당들을 때려눕히는 ‘인간시장’(행림)의 장총찬도 ‘정의’에 목말랐던 대중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결했다. 정비석의 ‘손자병법’(고려원)을 통해 난세를 살아가는 처세법을 배웠고,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김영사)는 청년들의 야망에 기름을 부었다. 물론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모래 위에 세운 집이 되어버렸지만. 서정윤의 시집 ‘홀로서기’(청하)가 밀리언셀러가 된 것도 이때였다.
1991~2005: 왜 숫자가 들어간 책이 사랑받는가
이 시기 베스트셀러에는 흥미로운 특징이 있다. 제목에 숫자가 포함된 책들이 사랑받았다는 것이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등 종합 1위를 차지한 책만 꼽아도 이 정도지만, ‘선과 악에 관한 35가지 이야기’ ‘20대에 해야 할 50가지 이야기’ 등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오른 책들도 유난히 숫자가 많이 보였다. 신뢰가 무너진 세상에서, 좀 더 확실해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급격한 압축 성장의 후유증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온 게 이 시기의 비극이기도 했다. 1994년에는 한강 다리가 무너졌고, 1995년에는 강남의 백화점이 주저앉았으며, 1997년에는 나라의 곳간이 텅 비어 버렸다. 돈벌이와 출세에 목숨 걸고 살아왔는데, 그게 다 허무한 일이 되어버린 것.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열린책들), 법정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동쪽나라), 조창인의 소설 ‘가시고기’(밝은세상), 오쇼 라즈니시의 ‘배꼽’(장원사)은 꼭 돈과 출세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알게 해준다.
2006~현재: 취향의 각개약진
세계화와 무한 경쟁 시대에 정의란 무엇일까. 2010년 베스트셀러였던 하버드대 교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일까’는 ‘정의’라는 가치를 새삼 주목하게 만들었다. 그 직전 론다 번의 ‘시크릿’(살림Biz)에 빠져들었던 대중의 마음을 생각하면, ‘고객 변심’이라는 농담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시크릿’은 “생각이 현실이 된다”는 세계관을 지닌 마음수련법. 2007·2008년 연속으로 베스트셀러 1위였다.
2011년의 베스트셀러는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쌤앤파커스)였고, 2012·2013년의 베스트셀러 1위는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쌤앤파커스)이 차지했다. IMF 시절보다도 더 힘들다는 요즘의 청년 실업 문제를 비롯, 속도와 물량 경쟁에 지친 현대인들을 부드럽게 달래는 미남 스님의 위로가 큰 인기를 얻었다. 2014년에는 광복 이후 최초로 스웨덴 소설의 작품(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베스트셀러 1위가 됐다. 2015년은 현재까지 아들러 심리학 열풍의 최전선인 ‘미움받을 용기’가 가장 앞줄에서 뛰고 있다.
※ 광복 70년 베스트셀러(1945~2015)
대한출판문화협회(회장 고영수)의 베스트셀러 집계와 교보문고 종합베스트셀러 통계를 바탕으로 매년 1권씩 70권을 선정했다. 교보문고 창립은 1980년 12월. 따라서 그 이전의 통계는 출협 자료다. 최근 출간된 전 출협 사무국장 이두영의 ‘현대한국출판사’(문예출판사 출간)를 참조했다.